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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건조함에 대하여

작성자
Lexcode
작성일
2019-02-11 10:31
조회
443


번역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건조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을 직접 상대하기보다는 텍스트를 주로 상대하다 보니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 담당자분들과 (특히 언제나 친절하게 맞아주시는 렉스코드 여러분들과^^) 계속 연락을 취하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텍스트를 바라보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텍스트라는 것은, 그 내용 여하를 불문하고, 시시각각 변하고 흐르는 현실 세계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존재하지요. 이런 의미에서의 “건조함”입니다. 그 텍스트와 연결된 사람들, 텍스트의 이면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번역사의 인식에서 사라지거나 부차적으로 될 때가 많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라는 문제가, 적어도 번역 작업이라는 면에서는 텍스트와의 관계에 묻히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따금씩, 사람과의 관계라는 문제가 텍스트의 건조한 표면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번역사는 텍스트의 이면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더 직접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는 작게는 용어 선택 과정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대명사를 선택할 때에 어느 한쪽 성별의 대명사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성별의 사람들을 배제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특정 대명사 사용이 번역물의 정확성이나 가독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통해서 번역사가 해당 대명사가 지칭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지니는가가 드러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명칭을 번역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택한 특정 단어를 해당 집단의 사람들 앞에서 직접 입에 올릴 경우, 그 말에 대해서 그들이 어떠한 감정을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좀 더 범위를 넓혀보면, 텍스트의 부분 부분에 그 주체의 삶과 경험이 진하게, 절박하게 묻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큐멘터리 스크립트나 개인의 인생사를 다룬 글을 번역할 때에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화자가 자신의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학대의 경험을 카메라 앞에서 드러낼 때, 텍스트의 해당 부분을 그저 텍스트로서 대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 말 하나하나에 담긴 무게가 어떤 것인지를 번역사로서도 직감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때 번역의 목표는 단순히 말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을 넘어서, 그 말에 담긴 경험과 각오의 무게, 그 무게를 짊어진 주체를 존중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존중을 번역을 통해 최대한 드러내려 애쓰는 것이죠.

반대로, 텍스트의 특정 부분이나 텍스트 자체, 또는 그 텍스트를 생산한 주체가 도저히 공감이 불가능하거나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텍스트의 내용이 (불법은 아닌) 각종 편법을 통해, 사회적으로 비난 받는 방식으로, 특정 대상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을 모의하는 것일 경우(글의 진행을 위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사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실제로 경험한 사례입니다), 번역사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물론 이때 번역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제한적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지식에 반한다고 해서 텍스트의 내용을 왜곡해서 번역하는 것은 번역사로서의 역할을 저버리는 것이 될 테니까요. 이 상황에서 번역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주체적인 선택은 그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에 대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선택마저도 금전적인 필요나 의뢰인과의 관계 등 각종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을 받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각 문제에 대한 답을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 요즘에 하게 되는 생각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옳은가, 즉 윤리적인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생각할 때, 확실한 정답을 찾는 것에 집착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사람과의 관계를 존중하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의 문제에서 윤리성이란 특정한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을 내리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얼마나 마음을 쓰는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과연 저 스스로는 얼마나 텍스트 이면의 사람과 세계에 마음을 써 왔는가, 다시 한번 반성해 보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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