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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

작성자
렉스코드
작성일
2020-09-29 11:05
조회
421

대학을 졸업한 그해 봄, 공항까지 마중 나온 친구의 눈가는 붉었다. 그 전 몇 달간, 자식을 모두 타지로 떠나보내야 하는 모정이 내어준 밥상에선 따뜻하면서도, 눈물에 푹 젖은 슬픔이 느껴졌다. 같이 있어도 가슴이 아리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는 순간, 이별의 슬픔은 멀어지는 고국의 모습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들었고, 난생처음 경험하는 구름 위의 풍경과 그 너머로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흥분은 점점 고조되었다. 내 앞에 펼쳐질 삶에 대해서 어떠한 예상도, 계획도 없었지만, 새로운 세상에 던져진다는 것 자체가 혹은 한국을 떠나 까마득하게 부유해 보이던 미국이라는 나라로 이민을 간다는 사실이 이미 모든 것을 이룬 듯 벅차게 느껴졌던 1990년이었다.

 

미국령 괌의 공항은 아담했다. 이민국 직원의 몇 마디는 살 떨리듯 무서웠다. 공항을 나오니 까무잡잡하게 탄 아버지와 우리 엄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못생긴 새엄마가 마중 나와 있었다. 열대지방의 습하고 더운 날씨가 특유의 냄새와 함께 훅- 하고 들어왔다. 이제 막 알을 까고 나온 병아리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세상은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공사판에서 헬퍼로 일을 시작했다. 새벽에 아버지의 낡은 고물 밴 옆자리에서 피곤에 덜 깬 채 잠을 달래며, 때로는 한국에서는 단 한 개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던 바나나를 마음껏 먹으며, 그때그때 달라지는 현장으로 출근했다. 공사장 청소를 하고, 자재를 옮기고, 그 밖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열대의 태양은 수건을 목덜미에 두르고 있지 않으면, 이미 탄 피부를 또다시 벌겋게 태울 정도로 뜨거웠다.

 

어느 날, 인부들이 대소변을 보기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기도 해서 오물이 가득 차 있는 땅 아래, 약 10m 깊이로 박힌 쇠파이프를 제거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온갖 궁리와 시도 끝에 결국 사람이 내려가서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며칠 간의 준비 후, 나는 도르래에 달린 발판에 서서 쇠파이프 안으로 내려졌다. 직경 1미터 남짓의 파이프는 어깨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넓이여서, 그 안은 어둡고, 악취가 진동하고, 참기 힘들 정도로 더웠다. 조심한다고 해도 일하다 보면 어깨가 쇠파이프에 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삽 위로 오물을 가득 채우면 위쪽에서 줄을 잡아당겨 올렸다. 오물은 내 얼굴 앞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극한의 환경은 오물의 내용물 따위에 신경 쓰는 것을 막아 주었다. 두어 시간쯤 작업한 후, 다시 도르래를 타고 밖으로 나오자 뜨겁던 열대의 공기조차도 고국의 가을 날씨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곳에서 처음 마신 체리 콜라는 여전히 신기한 맛이다.

 

점심시간에는 물에 말은 밥을 간단히 먹고 문틈으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옆 건물의 화단에 가서 종이 박스를 깔고 낮잠을 청했다. 어느 날은 그 건물의 직원이 반쯤 먹다 남은 케이크같은 것을 줬는데 그게 참 맛있었다. 그 빵의 이름이 ‘머핀’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일주일쯤 작업하고 나니 마침내 파이프의 오물을 대부분 제거할 수 있었다. 공사장에서는 그곳에 파이프를 박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고 했다. 그 현장은 괌 법원 건물 공사였다.

 

당시 괌의 해변은 일본계 호텔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라 호텔 건물을 작업할 일이 많았다. 타일 공사와 같이 자잘하게 수리해야 하는 공사는 항상 있었다. 어느 날은 호텔 수영장 둘레에 깨진 시멘트를 수리하는 공사를 맡았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이었지만, 파라솔과 벤치가 놓인 수영장과 내가 일하는 곳은 서로 다른 세계였다. 그곳에는 시원한 그늘 아래서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이 남국의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나는 뙤약볕 아래서 치열한 생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는 저임금 노동자로 이민 생활을 시작한 가난한 청춘에게는 언감생심 차마 다가가지 못할 다른 세상이었다. 일하는 간간이 머리 위로 낮게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저 비행기를 타면 반나절 만에 엄마가 있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치밀곤 했지만, 떠나온 자리는 하루하루 멀어져 갔다.

 

휴일이 따로 없는 게 노가다의 삶이기는 하지만, 가끔 쉬는 날에는 섬 주변으로 드라이브도 하고, 아버지를 따라 지인들을 만나서 통돼지 바베큐를 하기도 했다. 한인 식당에서 처음 먹어본 왕갈비는 환장할 정도로 맛있었다. 때로는 일 끝난 저녁에 아버지를 따라 당구 테이블이 놓인 로컬바에 가서 맥주 한 캔을 들고 어른들의 옆자리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그때 어떤 한인 아저씨는 미 육군에서 직업 군인으로 6년간 일했다는 경력(?)으로 한인들 사회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미군이 주는 밀가루, 껌, 초콜릿을 받아먹은 기억이 있는 우리 아버지와 그 세대들에겐 미국과 미군은 마치 우상처럼 자리 잡은 존재였다.

 

시간을 빠르게 감아 본토인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후에도 청소, 주유소, 웨이터, 바텐더, 대리운전, 그리고 심부름센터와 여행사를 하기까지, 이민자의 삶은 척박하고, 가난하고, 무시당하고, 무능력했고, 때때론 절박했고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러던 사이, 가정이 생겼는데 내 직업과 수입은 여전히 일정치 않았고 진학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쇼핑몰에서 우연히 미 육군 모병소에 호기심 삼아 들렀다가 미군에 오면 가족을 부양하면서 대학원까지 다닐 수 있다는 한국 모병 하사관의 말에 넘어가 적성검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 6년짜리 병과에 사인했다. 삶은 때때로 우연히 보이던 일들이 만나서 새로운 챕터를 열어간다.

 

애당초 가난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기득권이라는 것은 없는 이민자의 삶을 거쳐, 네트워크니 지연이니와 같은 연줄 등에 전혀 기댈 수 없이, 가족을 부양할 최소한의 급여와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준다면 총 들고 대신 전쟁터에 나갈 용의가 있다며 그렇게 6년간의 청춘을 바쳤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오직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실력으로 승부하는 것만이 유일한 성공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던 청년은 중년에 접어들면서 70여 명의 직원과 100억대의 매출을 바라보는 한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그러한 삶을 살아온 그의 눈에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종에서, 10%의 경쟁자가 더 생긴다고 격렬하게 반대하는 2030세대의 의사들이 철저하게 기득권에 물들어 있고,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집단으로 보인다. 거기까지는 그들의 자유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진다. 그는 의료정책의 주체는 의사, 정부뿐만 아니라, 그 서비스를 받는 국민도 포함된다고 믿는다. 그 자신도 기득권자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세상에는 이익보다 혹은 이익만큼 중요하게 지켜야 할 가치도 있다고 믿는다.

 

젊은 의사들의 문제는 비단 그들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 가치밖에 가르치지 못한 나를 포함한 베이비붐 세대에게도 같은 분량의 책임이 있다. 내 자식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죽으라고 과외 시키고, 좋은 대학에 진학 시켜, 출세까지 시켜야 한다는 이들의 출세 지향 주의 교육관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따위는 명품 가방에 달린 키링(key ring) 정도로 여기는 괴물이 되어서 날카로운 이빨로 이 시대와 세대를 갈라놓고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미 2천 500년 전쯤 이렇게 경고했다.

 

“내가 이 맹세를 깨트리지 않고 지낸다면, 그 어떤 때라도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으며, 즐겁게 의술을 펼칠 것이요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내가 이 맹세의 길을 벗어나거나 어긴다면, 그 반대가 나의 몫이 될 것이다.” 
이들과 남은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나는, 지금부터 어떤 꿈을 꾸어야 할지 막막해지는 요즈음이다.

 

아 참, 그래서 라떼는 말이야…UC 버클리 대학교 옆 La Strada에서 마시던 라떼가 정말 맛있었다고.

 



렉스코드 대표 함철용
yham@lexcode.com

전체 1

  • 2020-10-05 15:11

    함대표님 글 재미있게 잘 읽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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