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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여름 장마

작성자
렉스코드
작성일
2020-07-30 13:50
조회
147



회사 카페에 달짝지근하게 옥수수 삶는 냄새가 번지자 직원이 반색하면서 묻는다.

 

“무슨 옥수수예요?”

 

“아버님이 시골에서 농사지은 걸 보내주셨네요”

 

김이 솔솔 나는 삶은 옥수수를 쟁반에 그득 담아서 위층으로 올려보내고 실하게 생긴 한 통을 들고 깨무니 막 여물은 햇옥수수의 알갱이가 입안 가득 찬다. 옥수수란 놈은 생선보다 시간에 더 민감하다. 알맞게 익은 때를 맞춰서 수확하고 그날 바로 쪄 먹어야 툭툭 터진 알갱이 사이로 쫀득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옥수수 알갱이 껍질이 금방 두껍고 거칠어져서 아무리 쪄도 제맛을 내지 못한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아버님이 마침 알맞게 여물은 놈들을 새벽에 수확해서 당일에 바로 보내셨으니, 비록 하루쯤 걸리기는 했어도 제맛을 잃지는 않았다.

 

옥수수를 먹으면 비로소 여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릴 적 할머니 집 마당에는 살구나무와 자두나무가 있었다. 노랗고 빨갛게 익어가는 살구와 자두를 야금야금 따먹다 보면, 그때가 옥수수 철이었다. 땅이 경사지고 척박한 강원도 강릉이라 감자와 옥수수가 흔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쌀보다 상대적으로 흔하다는 뜻이지 절대양이 많다는 뜻은 아니었다. 식구가 많은 집에서 어른들은 옥수수를 반으로 뚝 잘라 나눠주시고는 했다. 나는 그 한 통을 온 놈으로 다 먹고 싶었지만 그런 행운이 흔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크기가 작고 알이 빨간 옥수수가 나왔는데 어른들은 그걸 월남 옥수수라고 불렀다. 월남에는 옥수수가 저렇게 생긴 건가 했다. 여자애들은 껍질째 삶아서 먹고 남은 옥수수로 인형을 만들었다.

 

목재상이던 할아버지께서 대관령 소나무를 베어다 지으셨다는 한옥 마루에 앉아 옥수수를 먹는 날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는 했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말로 옥수수 먹는 날 비가 자주 왔었는지, 아니면 한창 장마가 지는 절기에 옥수수를 먹다 보니 기억이 합성되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강원도 산골 어디쯤, 가재도 잡고 옥수수도 몰래 훔치고는 했다. 옥수수밭은 키가 커서 서리를 하기 좋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몇 통을 따서 오면 어른들에게 혼나고, 삶아봤자 알이 여물지 않아서 먹을 것이 없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옥수수가 야속했고, 그래도 먹고 싶었고, 그런 시절에도 비가 자주 내렸다.

 

이제 나는 삶은 옥수수를 즐겨 사 먹는다. 몇 해 전, 자전거로 국토 종주를 할 때의 일이다. 5km 정도를 꾸준하게 올라가야 하는 이화령 고개를 넘기 전, 삶은 옥수수 한 봉지를 사서 자전거 새들백에 넣고 정말 죽기 살기로 정상에 오른 후, 그 옥수수로 극심한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그때도 비가 양동이로 쏟아붓듯이 내렸다. 입가에 옥수수 알갱이가 묻어도 빗물에 그냥 쓱쓱 흘러내렸다. 그렇게 힘들면 중간에 서서 허기를 채웠을 법도 하지만, 나약한 인간은 하찮은 도전을 성취하면서 자신은 강하다고 믿는 법이다.

 

오늘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날이 덥지 않아도 수분을 잔뜩 머금은 눅눅한 공기 때문에 피부의 수분은 그대로 끈적하게 늘러 붙어 불쾌하다. 하지만 운동을 하기에는 비 오는 날이 좋다. 운동을 하면 어차피 땀에 쫄딱 젖으니, 비 맞는 건 상관없다. 지난 주말, 일기예보에서 비 온다고 했다며 걱정하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은 척도 안 하고 마침 쪄놓은 옥수수 한 통을 들고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금성에서 온 여자는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그때마다 잔소리를 하고, 화성에서 온 남자는 아무리 잔소리를 들어도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왜 하필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고 하고 남자는 화성에서 왔다고 했을까? 화성은 영어로 Mars인데 이것은 Martial(싸움, 격투)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남성형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금성은 영어로 Venus인데 이것은 아름다움과 사랑을 상징하는 여신을 뜻한다. 그래서 남자는 Mars에서 왔고, 여자는 Venus에서 왔다고 하면 직관적으로 이해되는데, 번역을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라는 의문이 든다. 평생 번역을 업으로 사는 사람이지만 번역은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원문의 의미를 100% 전달하지 못한다고 믿는 이유다.

 

하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금성에서 온 여자의 말을 뒤로하고 화성에서 온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따라 팔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중간에 그녀가 경고한 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몸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때론 마음도 적신다. 한강을 따라 심어진 나무와 풀은 더욱 싱싱한 초록빛으로 빛나는데 마음은 계속 울적해졌다. 문득 방향을 돌려 시청으로 향할까 하는 갈등이 생겼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에 입학하고도, 그리고 부와 명예가 보장된 사시에 합격하고도, 사회의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평생 헌신했다. 평생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남들을 위해서 살았지만, 치욕스러운 흠결 앞에 자신을 던졌다. 하지만 나는 비가 오는데 시청 앞까지 갔다 오면 저녁 먹을 시간을 놓칠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은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장사꾼인 나는 남들을 위해서 나의 삶을 헌신할 용기도, 그럴 의지도 없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 나아가서 도움이 된다면 큰 보람이겠지만,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내 삶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거나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특히 남들을 위하는 삶을 살더라도, 그 남들 중에는 극도의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발을 씻어 주는 사람에게 끝없이 학대를 당하는 상황을 견디는 것처럼 자학에 가까운 행동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보거나, 현재의 뉴스를 보아도, 나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토록 절벽 같은 현실을 뚫고 나가고자 한 인간의 의지가 더욱 안타깝고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어둠 내리는 빗속에서 나는 허기진 배를 옥수수로 채우며 그렇게 청승맞은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렉스코드 대표 함철용
yham@lexco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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