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내 삶의 1등석

작성자
렉스코드
작성일
2019-10-02 18:37
조회
138

 

어느덧 비행기 창밖의 도시 불빛들이 별빛처럼 반짝인다. 4-5년 만에 여권 하나를 출입국 스탬프로 가득 채울 만큼 관록이 붙은 터이지만, 비행기의 좁은 좌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긴커녕 더욱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낯선 타국으로의 여행이 주는 기대감과 흥분이 사라진 후에 남는 것은 지방행 우등고속버스 좌석마저 부럽게 느껴질 만큼 비좁은 이코노미석과, 동네 분식집에 있는 메뉴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기내식, “열차가 들어오고 있는” 지하철역보다 심한 비행기 엔진 소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악인 것은 얇은 팔걸이를 넘어오는 옆 사람과 어깨가 부딪치지 않도록 유지해야 하는 그 미세한 간격의 불편함뿐이다.

 

이 불편함은 아마도 옛날 노예선에서 노예를 이렇게 싣고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최대한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치해놨다. 내 무릎은 이미 앞 좌석 등받이에 정확하게 닿아 있고 나는 가능한 앞사람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이 압력을 일관되게 유지하려고 애쓴다.

 

실은 비행기라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따라 개인의 위치가 어떻게 정해지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밀집된 공간 안에 가장 철저하게 계급적으로 구분해 놓은 공간이다.  돈이 있다면 줄을 설 때부터 특혜를 받고, 탑승할 때도 우선권을 부여받으며, 다른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넘치게 여유로운 공간에서, 다른 계급의 사람이 먹지 못하는 음식을 먹고,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는 또 다른 특별한 것을 마시고, 심지어 “똥과 오줌”조차 다른 계급의 사람들보다 쾌적하게 해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굳이 자취할 때 이골이 나게 먹었던 라면을 끓여달라고 할 수도 있다.

 

남들보다 적게는 서너배에서 많게는 열 배가 넘는 돈을 냈으니 그런 특권을 부여받은 그들을 원망할 생각은 없다. 나나 당신이나 누구라도 돈만 있다면 모두가 그렇게 여행을 하고 싶지, 굳이 그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내 한 몸 희생해서 이코노미로 여행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냥 같은 본성을 소유하였으되 단지 카드의 한도액과 잔액만 다른, 그런 똑같은 인간인 것이다.

 

즉 ‘일등석(비즈니스석) 승객 – 돈 = 나’ 또는 ‘나 + 돈(또는 적립한 마일리지) = 일등석(비즈니스석) 승객’이 아닐까?

 

이 등식에 개인의 품성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섣불리 일등석 승객은 악마이고, 이코노미석 승객은 천사라는 그런 흥부와 놀부식의 프레임을 대입하지 말라는 말이다.

 

다만 비행기에서 좌석을 결정짓는 데는 객관적인 돈의 절대 액수 말고도 돈의 경제성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 작용하기는 한다. 즉 어느 노선의 가격이 좌석 등급과는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100만 원이라면, 우리는 100만 원짜리 항공권을 구매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노선의 가격이 좌석에 따라 200만 원짜리와 50만 원짜리로 구분되어 있다면, 우리는 판단을 해야 한다. 200만 원을 내고 하늘에서 편하게 지낼 것인지, 그 돈을 아꼈다가 나중에 땅 위에서 원하는 사치를 보다 누릴 것인지.

 

바로 이 선택이 나를 지금껏 비즈니스석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추석 연휴가 지나간 다음이라 그런지 이번 출장 길은 항공권도 여유가 있었고, 무엇보다 금액이 평소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평소 이코노미 석을 살 돈이면 비즈니스 석으로 넘어가는 승급도 가능했다.  게다가 나도 회사 대표한 지도 꽤 되었고, 지금껏 이코노미석에서 구겨져(?) 왔으면 이럴 때  비즈니스석에서 편하게 여행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갈등이 살짝 들었다. 특히나 평소에 나는 입버릇처럼 회사가 여유가 생기면 꼭 비즈니스석으로 출장을 다니고 싶다고 떠들고 다녔던 터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역시 비즈니스석 탑승은 실패했다. 저놈의 합리적 소비에 대한 강박적 자율적 집착, 영어로 번역하자면 “An impulsive and voluntary obsession for a maximum economical effect” 라고 해야 할까?

 

<필리핀 항공에서의 모습>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덧 비행기는 활주로에 터치다운을 하고 있다. 공항의 불빛들이 빠르게 뒤로 흐른다. 정기적으로 하는 여행이다 보니 짐은 단출해서 입국 수속하자마자 바로 택시를 잡고 호텔로 향한다. 낡은 택시의 에어컨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한 채, 습하고 더운 열대의 공기에 간신히 맞서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저 도시의 불빛들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낯선 땅, 낯선 건물, 낯선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 나의 회사, 우리 직원들이 일하고 있는 불빛이 있다는 사실이 뿌듯한 성취감으로 다가온다. 네 명으로 시작한 직원은 어느덧 서른 명 정도로 늘었다. 누군가에게나 자랑할 만큼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 해 한 해, 한 계단씩 올라왔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택시는 회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 앞을 지나 호텔로 향한다. 사무실에는 여전히 야근을 하고 있는 직원이 있을 것이다.

 

“회사가 더 커지면 난 비즈니스석을 타고 출장을 다닐 거야.”

 

이렇게 입버릇처럼 되뇌던 결심이 어쩌면 잘못된 주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코노미석으로 출장을 소화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 삶의 일등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렉스코드 대표 함철용
yham@lexcode.com


p.s. 이와 같은 연유로 나는 나름대로 편하게 여행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데 이것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자세한 내용은 렉스코드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blog.naver.com/lexcodemkt 로 읽으러 가기

전체 0

전체 228
번호 썸네일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228 “PM님, 이러다 아랍어 읽으시겠어요!”
“PM님, 이러다 아랍어 읽으시겠어요!”
“PM님, 이러다 아랍어 읽으시겠어요!” (2)
렉스코드 | 2019.10.02 | 추천 6 | 조회 1193
렉스코드 2019.10.02 6 1193
227 당신의 소비에는 이유가 있다.
당신의 소비에는 이유가 있다.
당신의 소비에는 이유가 있다.
렉스코드 | 2019.10.02 | 추천 5 | 조회 182
렉스코드 2019.10.02 5 182
226 내 삶의 1등석
내 삶의 1등석
내 삶의 1등석
렉스코드 | 2019.10.02 | 추천 3 | 조회 138
렉스코드 2019.10.02 3 138
225 번역회사 다니는데요, 번역사는 아닙니다.
번역회사 다니는데요, 번역사는 아닙니다.
번역회사 다니는데요, 번역사는 아닙니다.
렉스코드 | 2019.10.02 | 추천 3 | 조회 200
렉스코드 2019.10.02 3 200
224 내가 그동안 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
내가 그동안 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
내가 그동안 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 (1)
렉스코드 | 2019.10.02 | 추천 2 | 조회 159
렉스코드 2019.10.02 2 159
223 퇴사하는 신입사원과 점심 같이 먹었어요.
퇴사하는 신입사원과 점심 같이 먹었어요.
퇴사하는 신입사원과 점심 같이 먹었어요. (3)
렉스코드 | 2019.08.29 | 추천 4 | 조회 3639
렉스코드 2019.08.29 4 3639
222 커스텀하세요, 당신의 편집
커스텀하세요, 당신의 편집
커스텀하세요, 당신의 편집
렉스코드 | 2019.08.29 | 추천 1 | 조회 301
렉스코드 2019.08.29 1 301
221 허락을 무시하는 용기
허락을 무시하는 용기
허락을 무시하는 용기
렉스코드 | 2019.08.29 | 추천 7 | 조회 315
렉스코드 2019.08.29 7 315
220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
렉스코드 | 2019.08.29 | 추천 2 | 조회 324
렉스코드 2019.08.29 2 324
219 나의 서울라이프
나의 서울라이프
나의 서울라이프
렉스코드 | 2019.08.29 | 추천 2 | 조회 285
렉스코드 2019.08.29 2 285
218 VR≠VR(Virtual Reality) (VR은 VR이 아니에요.)
VR≠VR(Virtual Reality) (VR은 VR이 아니에요.)
VR≠VR(Virtual Reality) (VR은 VR이 아니에요.)
렉스코드 | 2019.08.05 | 추천 1 | 조회 1728
렉스코드 2019.08.05 1 1728
217 번역가로 살아남기
번역가로 살아남기
번역가로 살아남기
렉스코드 | 2019.08.05 | 추천 6 | 조회 462
렉스코드 2019.08.05 6 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