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번역가로 살아남기

작성자
렉스코드
작성일
2019-08-05 10:53
조회
211

‘대장금’은 2003년도에 방영해 99개국에 수출된 대표 한국 드라마입니다. 54부작 중 수라간 정상궁이 어린 장금이에게 왜 고기에서 홍시 맛이 나는지 묻자,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라고 답하니 이에 정상궁은, “타고난 미각은 따로 있었구나! 홍시가 들어있어 홍시 맛이 난 걸 생각으로 알아내라 한, 내가 어리석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번역 노하우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선뜻 대답은 나오지 않고 어린 장금이와 정상궁의 이 대화가 떠오릅니다.

한 번은 영어 문제를 풀고 있는 아들에게 독해가 되냐고 묻자 무슨 내용인지 대충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해한 것을 말로 풀어 보라고 하였더니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말로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들의 말처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번역은 말이 아니라 글입니다. 오히려 말보다 더 정교하고 논리를 요구하는 작업이지요. 누구나 머릿속에 아름다운 풍경을 그릴 수 있으나 아무나 이를 손끝으로 화폭에 담을 수 없듯이 ‘추상적인 이해를 글이란 구체적인 매개물로 표현하는 것’은 ‘무슨 내용인지 대충 알겠다’는 것과 별개입니다. 인고의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지요. 글에 대한 감각과 그것을 함양하는 과정을 거쳐야 양질의 번역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어느 대학의 홍보 소책자 번역을 맡았을 때 일입니다. 해당 학교의 총장 인사말을 번역하는데, 진심으로 고민이 될 만큼 어체에서 연륜이 느껴졌습니다. 원문의 문체를 살리기로 결정하고 번역물을 보냈는데 감수 결과가 난감하더군요. 해당 대학의 외국인 강사가 감수 후 수정한 내용을 보내왔는데 원문과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도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 당시 저의 번역 감수를 맡고 있던 외국인 교수는 해당 피드백을 보더니 이건 감수가 아니라 창작이라 하더군요. 번역이 창작인가요? 제 생각에 번역은 창작이 필요하지만, 완전한 창작은 아닙니다. 무형의 화폭 위에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려진 다양한 화풍의 그림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지요. 까딱 잘못하면 원본이 훼손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번역가는 글에 따라 다양한 번역 방식으로, 때로는 본인의 개성을 섬세히 가미하면서 번역을 진행해야 합니다.

때때로 번역 작업은 조각 그림 맞추기(jigsaw puzzle)와 비슷합니다. 직관적이고 미적분학적 사고가 특히 한영 번역에 유용합니다. 한글 어순을 미분하여 영어 어순으로 적분하는 거지요. 이 때문에 마치 직관적이고 반복적이며 순발력 있게 도형을 끼워 맞추는 테트리스 게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양질의 번역을 생산해야 하는 번역가에게 무한의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마감 일자를 맞추려면 속도전도 감내해야 합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 흐름을 요구하는 번역에 테트리스 게임처럼 미적분학적 방법을 사용하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습니다.

일전에 한 지인이 반신반의하며 묻던 질문이 떠오릅니다. 홈페이지나 매뉴얼 등은 구글 번역기로 돌린 게 아니냐고.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번역기 때문에 번역가란 직업이 사라질 거라는 암울한 미래의 예측에 거부감이 들어 그동안 가능한 번역기 사용을 지양했습니다. 아집이었죠. 번역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입니다. 오히려 해당 기술을 활용하면 번역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워드 작업량이 줄어들어 시간 대비 작업량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엄청난 양의 번역 데이터를 기반으로 선택된 용어의 신빙성 역시 꽤 높기 때문에 바로 구글이나 다른 포털사이트를 통한 확인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고 검색 시간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잘 활용하면 양질의 번역본이 나오는 번역기 사용이 때로는 필요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번역가는 작가이자 편집자이고, 기술자이자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글쟁이지만 전적으로 본인의 글을 쓸 수 없고, 글의 종류, 독자 그리고 의뢰인에 따라 여러 가지 접근 방식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문장 구사는 기술자처럼 정확한 정보에 기반해야 하지만 본인의 개성이 완전히 배제된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라 예술가처럼 창의성도 발휘해야 합니다. 즉, 번역은 단순한 글의 치환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번역가로 살아가고, 앞으로 번역가로 살아가기 위해 글에 대한 감각뿐만 아니라 끈기와 지적 호기심, 신기술 활용능력과 열린 마음, 그리고 책임감의 중요성을 잊지 않고 항상 초심으로 번역에 임하려고 노력하고,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렉스코드 번역사

전체 0

전체 219
번호 썸네일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218 VR≠VR(Virtual Reality) (VR은 VR이 아니에요.)
VR≠VR(Virtual Reality) (VR은 VR이 아니에요.)
VR≠VR(Virtual Reality) (VR은 VR이 아니에요.)
렉스코드 | 2019.08.05 | 추천 1 | 조회 1136
렉스코드 2019.08.05 1 1136
217 번역가로 살아남기
번역가로 살아남기
번역가로 살아남기
렉스코드 | 2019.08.05 | 추천 5 | 조회 211
렉스코드 2019.08.05 5 211
216 바다와 하늘이 닿아 있었다: 2019 렉스코드 팀장 세부 컨벤션 포토로그
바다와 하늘이 닿아 있었다: 2019 렉스코드 팀장 세부 컨벤션 포토로그
바다와 하늘이 닿아 있었다: 2019 렉스코드 팀장 세부 컨벤션 포토로그
렉스코드 | 2019.08.05 | 추천 2 | 조회 160
렉스코드 2019.08.05 2 160
215 장부 마감에 대처하는 경영지원팀의 자세
장부 마감에 대처하는 경영지원팀의 자세
장부 마감에 대처하는 경영지원팀의 자세
렉스코드 | 2019.08.05 | 추천 2 | 조회 133
렉스코드 2019.08.05 2 133
214 추억으로 살아요
추억으로 살아요
추억으로 살아요
렉스코드 | 2019.08.05 | 추천 2 | 조회 146
렉스코드 2019.08.05 2 146
213 [기업탐방/버추얼랩] 소재 시뮬레이션도 페이스북처럼, 어때요?
[기업탐방/버추얼랩] 소재 시뮬레이션도 페이스북처럼, 어때요?
[기업탐방/버추얼랩] 소재 시뮬레이션도 페이스북처럼, 어때요?
LEXCODE | 2019.07.09 | 추천 4 | 조회 876
LEXCODE 2019.07.09 4 876
212 중국인 감수자가 알려주는 중국어 TIP
중국인 감수자가 알려주는 중국어 TIP
중국인 감수자가 알려주는 중국어 TIP
LEXCODE | 2019.07.09 | 추천 5 | 조회 487
LEXCODE 2019.07.09 5 487
211 루다를 보면 렉스코드의 미래가 보여요.
루다를 보면 렉스코드의 미래가 보여요.
루다를 보면 렉스코드의 미래가 보여요.
LEXCODE | 2019.07.09 | 추천 3 | 조회 481
LEXCODE 2019.07.09 3 481
210 로컬리제이션의 핵심, 프로젝트 매니저가 얼마나 빡세냐면요…
로컬리제이션의 핵심, 프로젝트 매니저가 얼마나 빡세냐면요…
로컬리제이션의 핵심, 프로젝트 매니저가 얼마나 빡세냐면요…
LEXCODE | 2019.07.09 | 추천 2 | 조회 514
LEXCODE 2019.07.09 2 514
209 [미생일기] 나의 소박한 소망
[미생일기] 나의 소박한 소망
[미생일기] 나의 소박한 소망
LEXCODE | 2019.07.09 | 추천 4 | 조회 464
LEXCODE 2019.07.09 4 464
208 관광지명은 어떻게 표기하는지 아시나요?
관광지명은 어떻게 표기하는지 아시나요?
관광지명은 어떻게 표기하는지 아시나요? (2)
Lexcode | 2019.06.10 | 추천 5 | 조회 979
Lexcode 2019.06.10 5 979
207 썸 타는 썸다방(Thumbs café)에서
썸 타는 썸다방(Thumbs café)에서
썸 타는 썸다방(Thumbs café)에서
Lexcode | 2019.06.10 | 추천 3 | 조회 377
Lexcode 2019.06.10 3 377